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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에 다시 태어난 스파 도시 영국 바스

by 페이냥 2025. 9. 11.

영국 남서쪽의 바스(Bath)는 로마 시대부터 온천으로 유명했지만,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거듭났습니다. 단순한 요양지가 아니라 귀족과 중산층이 모이는 사교의 무대, 화려한 건축과 쇼핑 문화가 융성하는 근대 도시로 성장한 것입니다. 앤 여왕의 방문, 교통 발달, 그리고 보 내시와 같은 인물들의 활약이 바스를 런던에 버금가는 도시로 만들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18세기 바스가 어떻게 유럽 사교계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8세기에 다시 태어난 스파 도시 영국 바스
18세기에 다시 태어난 스파 도시 영국 바스

1. 온천에서 사교의 장으로 바뀐 도시

바스는 이름 그대로 온천의 도시입니다. 로마인들이 1세기에 이곳에 목욕탕과 사원을 세운 뒤로, 바스는 치유와 휴양의 상징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러나 중세와 근세 초기의 바스는 소규모의 지방 도시로, 병자나 요양객들이 찾는 조용한 곳에 불과했습니다.

18세기 들어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온천수를 마시는 치료법이 유행하면서 건강과 휴식을 찾는 귀족과 상류층이 바스로 몰려들었습니다. 1702년에는 앤 여왕이 직접 바스를 방문해 명성을 더했습니다. 여기에 교통 환경이 개선되면서 도시 접근성이 좋아졌고, 여행과 관광이 점차 대중화되었습니다. 새로 부를 축적한 중산층도 요양과 오락을 즐기고 싶어 했고, 바스는 이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공간으로 부상했습니다.

문학 작품 속에서도 바스는 자주 등장했습니다. 토바이어스 스몰렛의 험프리 클링커의 여행이나 제인 오스틴의 노생거 사원, 설득은 바스를 배경으로 한 사교와 연애, 소비 문화를 생생히 그려냈습니다. 특히 오스틴은 바스를 젊은이들이 사교와 연애를 즐기는 무대로 묘사해 당시 도시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었습니다.

이처럼 18세기 바스는 온천 요양지라는 전통적 이미지를 넘어, 사회적 교류와 문화 활동이 활발히 일어나는 사교 도시로 자리 잡았습니다.

2. 바스의 왕 보 내시와 화려한 사교계

바스를 단순한 요양지가 아닌 사교의 중심지로 만든 핵심 인물은 보 내시였습니다. 세련된 옷차림과 매너로 이름을 날린 그는 1704년부터 반세기 동안 바스의 사교계에서 사실상 최고 권위를 지닌 마스터 오브 세레모니로 활동했습니다.

내시는 무도회, 음악회, 카드 모임 같은 행사를 주관하며, 처음 방문한 사람들이 원활히 사교에 참여할 수 있도록 연결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는 거친 언행을 억제하고 품위 있는 매너를 권장해 바스를 세련된 사교 공간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또한 다양한 계층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 귀족과 중산층이 자유롭게 교류하는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었습니다.

바스의 중심지는 펌프 룸이었습니다. 방문객들은 이곳에서 온천수를 마시고 음악을 감상하며 사교 시간을 보냈습니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 속 주인공들이 연애를 시작하거나 인연을 찾는 장소로 펌프 룸이 묘사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이곳은 단순한 휴양 시설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망을 형성하는 무대였습니다.

또한 어셈블리 룸에서는 무도회와 음악회, 연극이 정기적으로 열렸습니다. 사교 시즌에는 매주 수차례의 행사로 도시가 활기를 띠었고, 바스는 런던에 이어 가장 화려한 사교 도시로 불렸습니다.

보 내시와 같은 인물 덕분에 바스는 요양과 치료의 공간에서 사교와 오락의 중심지로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었습니다.

3. 팔라디언 건축과 쇼핑이 만든 소비의 도시

사람들이 몰리자 도시 자체가 변화했습니다. 바스의 인구는 18세기 후반 3만 8,000명까지 늘었고, 이를 수용하기 위해 대규모 건축 프로젝트가 추진되었습니다. 건축가 존 우드 부자와 후원자 랠프 앨런은 바스를 신고전주의 건축의 전시장으로 만들었습니다.

대표적인 건축물이 로열 크레센트와 서커스였습니다. 이 건물들은 고대 로마 양식에 기초한 팔라디언 스타일을 바탕으로 웅장함과 균형미를 보여주었습니다. 단순한 주거 공간을 넘어 도시의 품격을 상징하는 명소가 된 것입니다. 오늘날 바스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소비 문화도 빠질 수 없었습니다. 밀섬가를 중심으로 고급 상점들이 즐비해지면서 바스는 쇼핑의 도시로 떠올랐습니다. 모자, 도자기, 시계, 장신구 등 사치품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고, 윈도쇼핑이라는 새로운 소비 문화도 정착했습니다. 도서관과 아이스크림 가게, 사치품점까지 등장해 바스는 런던 못지않은 소비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화려함 뒤에는 그림자도 있었습니다. 도박이 성행했고 지나친 사치와 소음, 무질서, 성적 문란함이 비판받았습니다. 스몰렛의 소설 속 보수적인 인물 브램블씨가 바스를 소란스럽고 무질서한 곳이라 묘사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18세기 말에 이르러 사람들은 보다 조용한 휴양지를 찾기 시작했고, 바스의 전성기는 점차 막을 내렸습니다.

 

바스는 고대 로마 온천도시에서 18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사교와 소비의 도시로 거듭났습니다. 온천이라는 자연적 자원, 앤 여왕의 방문, 개선된 교통, 그리고 보 내시와 건축가 존 우드 같은 인물들이 만든 도시의 혁신이 이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화려한 건축과 사교 문화, 쇼핑의 발전은 바스를 런던에 이은 또 하나의 중심지로 만들었습니다. 비록 지나친 사치와 사회적 문제로 전성기는 짧게 끝났지만 바스는 여전히 영국 역사와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도시로 남아 있습니다.